줄거리
1923년 일본 도쿄의 거리를 달리는 인력거꾼 박열(이제훈 분)은 조선인 차별에 맞서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조직해 활동합니다. 어느 날 잡지에 실린 자신의 시 〈개새끼〉를 읽고 찾아온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는 동거를 제안하며 그의 투쟁에 동참합니다. 두 사람은 사랑과 혁명을 함께하는 동지가 되지만, 박열은 후미코에게 숨긴 채 황태자 암살 폭탄 계획을 추진합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관동 대지진은 일본 정부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됩니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김인우 분)는 조선인 폭동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돌리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열은 황태자 암살 모의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됩니다. 재판장에서 박열은 "조선인으로서 대역죄를 짓는 것이 영광"이라며 당당히 혐의를 인정합니다. 후미코 역시 함께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지만, 박열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2년 후 석방됩니다. 영화는 박열이 독립운동가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재판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일본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검사의 질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노렸다"는 박열의 답변은 법정을 발칵 뒤집습니다. 후미코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는 것은 기쁨"이라며 오히려 만세를 외칩니다. 이들의 당당한 태도는 일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조선 전역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극적 재구성으로 풀어내며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습니다.
실화 내용
실제 박열(1902-1974)은 1923년 관동 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에 의해 조작된 '대역사건'으로 체포된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덮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되었으며, 일본 황실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박열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천황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오히려 혐의를 자청했습니다. 이는 영화에서 극명하게 재현된 부분입니다.
가네코 후미코(1903-1926)는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로, 일본인임에도 조선 독립운동에 가담한 특이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로 사회 체제에 회의를 품고 아나키즘에 귀의했습니다. 영화에서는 후미코가 박열에게 먼저 동거를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선 강인한 여성 운동가였습니다.
1926년 후미코는 복역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영화에서는 사형 집행 전 옥중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부분은 영화적 각색으로, 실제 사인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박열은 1945년 광복 후에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평생을 통일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영화는 그의 투쟁이 단순한 반일 감정을 넘어 인류 보편의 자유를 추구했음을 강조합니다.
총평
이준익 감독은 '박열'을 통해 역사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박열 역의 이제훈은 광기와 열정을 동시에 보여주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재판 장면에서 "내가 바로 대역죄인"이라고 외치는 대사는 관객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최희서는 후미코의 강인함과 연약함을 교차로 표현하며 신인 배우의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그녀가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영화의 미학적 선택도 주목할 만합니다. 제작비 26억 원의 저예산 제한 속에서도 도쿄 거리의 분위기를 세트로 재현해 냈습니다.. 화려한 액션 대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연출은 역사의 무게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다만 일부 역사학자는 박열의 아나키즘 사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박열'은 일제 강점기 숨겨진 인물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영화 개봉 후 박열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에서는 추모 사업이 활발해졌으며, 역사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실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반일 영화를 넘어 권력에 맞선 보편적 저항 정신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29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은 역사의 교훈과 인간 승리의 감동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