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190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정성화)은 동지들과 함께 왼손 약지를 절단하며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맹세합니다. 2년 전 의병 활동 시절, 일본군 포로를 인도적으로 풀어주었다가 역습을 당해 전우들을 잃은 트라우마를 안은 채 그는 새로운 거사 계획을 세웁니다.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가 일본 궁녀로 위장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토의 하얼빈 방문 일정을 확보한 안중근은 우덕순(조재윤), 조도선(배정남) 등 동지들과 함께 치밀한 준비에 돌입합니다.
만두가게 운영자 마두식(이현우) 남매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마련한 독립군들은 러시아 현지 경찰의 눈길을 피해 무기와 복장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 와다의 추적이 점차 좁혀오면서 마두식이 희생당하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하얼빈 역 광장에서 안중근은 단 두 발의 총성으로 식민 지배의 상징을 무너뜨립니다. 체포 후 뤼순 감옥에서의 재판 장면에서는 "나는 대한제국의 군인이다"라는 그의 당당한 선언이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영화는 안중근의 최후를 장엄한 합창으로 마무리하며, 미처 찾지 못한 유해의 행방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을 선택합니다. 특히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가 보낸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라"는 편지 내용은 모자 간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며 역사적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킵니다. 뮤지컬 넘버에서 펼쳐지는 나문희의 애절한 노래는 영화의 감동적 클라이맥스를 완성합니다.
실화 내용
실제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6일 사형되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은 역사적 사실로, 1909년 3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11명의 동지가 약지를 절단하며 결의를 다진 사건을 각색한 것입니다. 실제 안중근은 의거 직전을 집필하며 아시아의 평화 공영을 주장했으나, 영화에서는 시간적 제약으로 이 부분이 생략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요 인물인 설희는 실존 인물이 아닌 창작 캐릭터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시녀 복장을 한 점에서 역사적 상징성을 담아냈습니다. 실제 안중근의 해외 활동에는 현익철·이위종 등 주변 인물들이 적극 협력했으며, 특히 러시아 한인 사회 지도자 최재형의 도움이 컸으나 영화에서는 극적 긴장감을 위해 이들의 역할을 간소화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안중근이 재판장에서 펼친 연설의 실제 기록에는 15개 조항의 일본 만행이 열거되어 있으나, 영화에서는 주요 4개 항목만 선별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묘사한 와다 경부 역시 실존 인물 와다 사쿠를 모티브로 했으나, 실제보다 더 극적인 악역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영화 말미에 화면을 가득 채우며 그의 정신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사형 직전까지도 태극기를 그린 종이를 몰래 제작해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등 끝까지 독립 정신을 불태웠습니다.
영화에서 생략된 중요한 사실은 안중근의 종교적 신념입니다.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를 가진 그는 옥중에서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글을 남겼으나, 작품에서는 민족주의적 측면만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실제 사형 집행 과정에서 일본 측이 안중근의 유족에게 유해를 반환하지 않은 점은 영화의 열린 결말로 암시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경과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총평
'영웅'은 한국 영화사에 남을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뮤지컬 장르의 한계를 넘어선 윤제균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작품으로, 역사적 사건을 현장감 있게 재현하면서도 음악적 상상력을 가미했습니다. 특히 기차역 암살 장면에서 실제 영상과 CG를 합성한 기술은 관객을 1909년 하얼빈 역으로 시간 이동시킨 듯한 생생함을 선사합니다. 정성화의 열연은 안중근 의사의 강인함과 인간적 약점을 동시에 구현해 내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트럼보' 연기를 연상시킵니다.
음악적 완성도가 특히 뛰어난 이 작품은 클래식 크로스오버와 트라디셔널 한국 음악의 융합을 시도했습니다. 주제곡은 현대적인 록 어레인지먼트로 재해석되며 관객들의 박수를 유발했고, 일본군의 행진곡에 대비되는 한국 측 음악의 서사적 사용은 청각적 상징주의를 완성했습니다. 다만 일부 코믹 장면(만두가게 에피소드 등)은 전체적인 어두운 톤과의 괴리감을 주며 작품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의 창의적 각색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은 점이 돋보입니다. 설희 캐릭터 창조를 통해 당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조명한 것은 기존 남성 중심 서사를 탈피한 시도로 의미가 큽니다. 그러나 실제 안중근의 사상적 깊이(동양평화론 등)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영화의 백미는 나문희가 연기한 조마리아의 모성애 표현으로, 장면에서의 눈물 연기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위인전이 아닌 민족적 트라우마의 치유 과정을 보여줍니다. 집단적 기억 속에 각인된 항일 정신을 현대적 미학으로 재탄생시킨 '영웅'은 K-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Z세대 관객들에게 역사의 무게를 전달하면서도 공연 예술의 즐거움을 선사한 점에서 교육적·예술적 성과를 동시에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